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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27. 01:28 from 흘러가는대로

학창시절 살던 동네의 스타벅스에 갔다가 1년 반 동안 같이 등하교 버스를 타고 다닌 고등학교 동창을 보았다마른 몸, 수더분한 머리와 까무잡잡한 얼굴이 여전했다. 장난끼가 가득했던 눈빛에서 살짝 피곤이 보였지만 교복이 아닌 양복을 입고 있으니 오히려 그 편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키가 큰데도 고등학생이 되도록 변성기가 오지 않은 것 같은 앳된 목소리가 묘한 친구였다. 


하필 그 동네에서 그 아이를 보니 고등학교 시절이 어렴풋이 떠올랐는데 막상 기억을 뒤져보니 그 어떤 추억도 선명하지 않아 놀랐다. 그 순간, 확연해졌다. 나와 너는 더 이상 18살이 아니구나. 우리가 같은 버스를 타고 마지막으로 웃었던 해 이후로 10년이 흘렀구나. 하긴, 오늘 갔던 그 스타벅스도 내가 이사간 이후에 생긴 곳이었지. 


그 친구와 1년 반 동안 같은 버스를 타고 다녔다. 12호 버스를 타는 아이들 중에서도 나를 비롯해 학교에서 멀리 산 열댓명은 꽤 친했다. 집에 오는 길이 40분이 넘게 걸리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오늘 만난 친구는 장난끼가 넘치는데도 어딘가 페미닌해서 여자친구들과 사이가 좋았다. 그러다 2학년 7월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로에게 말을 안 하기 시작했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여전했다. 나랑만 대화를 안 하기 시작했다. 나를 의식적으로 외면하거나 무시한 건 아니었다. 그냥, 정말로, 서로 말을 안 하게 됐다.


아직까지도 계기가 뭐였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한동안 내가 그 애에게 생일 선물을 주지 않아서 삐진거라고 잠시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그때도 누군가의 생일을 챙기는 섬세한 사람이 아니었다. 7월 18일, 아직도 걔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 친구가 5일 전이었던 나의 생일 선물을 줬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침묵이 생각보다 너무 오래 가자 나는 당황했다. 


정말 화가 난 걸까. 너의 생일을 잊은 것 말고 내가 더 크게 잘못한 게 있을까. 내가 사과해야할까. 하지만 시간이 이미 지났는데 이제와서 생일선물을 주는 게 의미가 있을까. 나한테 화가 났냐고 물어볼까. 아니야 정말 나한테 화가 났다고 하면 나는 어쩌지? 


그렇게 버스를 탈 때마다 한달을 고민하다가 나는 그 애와 단둘이 얘기할 두어번의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다른 아이들과 웃고 떠들 때 그 애를 잡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냥 캐쥬얼하게 옆에 앉아서 너 나한테 화난 거 있냐 라고 물어보면 그만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건 거절의 두려움과 약간의 자존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실 두어달이 지나고 나서는 그 애도 그냥 내게 다시 말을 걸 타이밍을 놓친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심한 구석이 있는 친구였으니까. 


그리고 정확히 5개월 뒤, 나는 이사를 갔다. 12호 버스의 친구들과 제대로 작별인사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이가 서먹하던 동안엔 그 친구와 마주치느니 그 친구가 떠들고 있는 무리에는 아예 끼질 않았던 거 같기도 하고.. 그 버스를 탔던 아이들과는 결국 평생 친구가 되진 못했다. 학교에서 만나도 예전같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연락했던 건 결국 생애 첫 썸남이 됐던 다른 남자친구 뿐이었다. (참고로 그 새끼랑은 정말로 끝이 별로 좋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엔 그 친구에 대해 떠올리지 않았었다. 특별히 그 친구를 잊었다기보다 재수를 하면서 고등학교와 연관된 모든 것들은 상자에 담아 자물쇠를 걸듯 잊으려고 했다. 그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일부였다. 


최근에 와서야 갑자기 근황이 궁금해져서 페이스북에 찾아봤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 역시 그 친구다웠다. 활발했지만 튀거나 나서는 걸 좋아하는 친구는 아니었다.


사실 오늘도 결국 말을 걸지 못했다.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있어서 스스로 놀랐다. "나를 반가워하지 않으면 어쩌지." 나는 걔가 반가웠다. 그러면서도 막상 인사를 하면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마지막에 우리는 서로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했는데 오랜만에 만났다고 반갑다고 해도 되는걸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병신 같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10년을 건너뛰어서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스타벅스 한 가운데 앉은 그 친구의 얼굴을 찰나에 알아볼 수 있게 해준 건 분명 반가움이었다. 내가 찰나에 너의 얼굴을 알아봤듯 너도 나를 알아봤을까. 네가 나를 알아봐주길 바라면서 자처해서 커피를 가지러 갈 때 그냥 말을 걸어볼걸 그랬어. 모르는 사람에겐 잘도 말을 거는데 왜 너에겐 어려웠을까. 뭐하고 지냈냐고, 궁금했다고 말을 했으면 됐을걸 그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네가 그렇게 빨리 나가버릴 줄 몰랐지. 나 마음 준비하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지. 


지나가버린 시간이 이렇게나 씁쓸하다. 나는 10년 전의 서툴렀던 나와 아직도 화해를 못한 기분으로 스타벅스를 나왔다. 너는 아직도 그대로구나. 먼저 용기를 냐고 손을 내미는 것에 서투른 그 모습 그대로야. 


공교롭게도 그 순간 내 옆에 앉아있었던 중,고등학교 내내 내게 수학을 가르쳐주신 옛 과외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한 거 같아요. 요즘도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는 악몽을 꿔요. 중간고사 첫 날인데 공부를 하나도 하지 못한, 기분 나쁘면서도 익숙한 감각이 되살아나요." 선생님은 웃으면서 점점 더 무뎌진다고 했다. 점점 더 그 시절이 아무렇지 않아진다고. 그리고 그때 옛 친구를 만나면 내가 부족하다고 느꼈던 건 나의 자격지심이라는 걸 알게 된다고 했다. 조금만 더 지나서 널 지나친다면, 그땐 나도 할 수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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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극세사 스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