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글을 단 한 개도 쓰지 않았다니. 2013년 블로그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포스팅을 단 한번도 하지 않은 해가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쉰 것도 안 쉰 것도 아닌" 모든 게 애매한 해였지만, 내게 무척이나 필요했던 휴식을 길고 얇게 받은 것 같은 그런 1년이었다.

 

그럼에도 정리하는 의미에서 정산을 해본다. 

 

1월 - CES 2020을 다녀왔다. ㅁㅁ선배가 퇴사하기 전, 이 일을 하면서 한번은 다녀와야 한다고 했던 전무후무한 테크 행사. 자동차 회사의 멤버로 참석했는데, IT 역시 내 담당이었기 때문에 꾸역꾸역 전자회사들의 행사도 기웃거리다 왔다. 오후에 구경하고, 정해진 스케쥴 틈틈히 다른 회사들 부스 다녀오고 얼굴 도장도 찍고. 밤새 기사를 쓰고, 어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는 호텔 아침 식사를 넘기던 그 4일이 너무 뿌듯하고 행복했다. 몸은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끊임없이 움직이고 쓰고 또 쉴 새 없이 돌아다니면서 본 재미있는 것들을 내가 느낀 만큼이나 흥미롭게 글로 풀어내기 위해 머리를 싸맸던 그 시간이 너무 감사했다. 우리 팀이 전체 하는 일과 중 3분의 1을 일주일 내내 소화해냈다. 그건 나를 위해서기도 했지만 우리 회사로선 직원을 CES에 보내는 게 n년만이었기 때문에 내가 잘하고 성과를 내야 내년에도 누군가에게 기회가 갈 거라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 때문에 CES 전체가 온라인 행사가 됐기 때문에 그 누군가의 다음 기회는 오지 않았다. 

 

CES로 라스베가스에 머물던 그 며칠 새에 대학원 두 곳에 원서를 넣었다. 미리미리 했으면 문제 없었을 터인데 나는 그런 위인이 못되지. 출장을 가서 이동 버스 안에서도 원서를 쓰고, 다른 멤버들은 시간 떼우라고 아울렛에 내려줬을 때에도 나는 벤치에 앉아 쓰고 고쳤다. 마지막엔 거의 울다시피 했던 거 같다. 친구들에게 고맙다. 나같이 게으른 징징이의 칭얼거림도 참아주고.

 

정신 없이 며칠을 보냈지만, 결과적으로 출장은 성공이었다. 임무는 맡은 바 이상으로 해냈고, 대학원 원서도 무사히 넣었고, 분실물은 카드 두개 뿐이었다.

 

4월 - 지원했던 학교 두 곳 다 합격했고 장학금도 받았다. 조금 긴가민가했지만 솔직히 합격은 자신 있었다. 장학금은 의외였다. International student, 그것도 한국에서 학부를 졸업한 후보생에게 그렇게나 많은 장학금을 줄 줄은 몰랐다. C대학에선 학비의 반이 조금 안 되는 장학금을 제안 받았고 N대학에선 fellowship을 받았는데, 돈 밝히는 이미지의 N대학이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해서 뿌듯했다. 

 

그 당시엔 합격 자체보다, 지난 3년 간 해온 일이 헛되지 않았다고 인정 받은 기쁨이 더 컸다. 한국에 기반을 두고 영어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꾸준히 느껴온 한계가 미국 대학원을 지원한 큰 계기였다. 업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두 학교가 장학금을 제안한 건 훈장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코로나 때문에 두 학교 모두 가을에 입학하지 못했지만, 2019년 내내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던 내게 대학원 합격 통보는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딱 그 시기에 입사한지 1년이 갓 된 후배가 경쟁사로 이직을 했다. 회사에 기둥이 하나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였고, 선배로서 그를 지키지 못했단 죄책감, 내가 선배로서 부족했기 때문에, 본받고 싶은 선배가 아니었기 때문에 떠난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 동시에 나마저 대학원으로 빠지면 우리 팀은 어떡하지, 라는. 회사와 개인의 삶을 분리하지 못한 4년차 병아리의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만 생각해야 된다는 걸 알면서도 냉철하게 굴지 못했다. 

 

마침 그 시기에 코로나가 아시아 뿐만 아니라 유럽, 미국에서도 확산이 심각해져서 겸사겸사 가을에 출국하는 걸 무르게 되었다. 

 

이후 - 미국에 가는 걸 미루기로 결정한 순간부터는 순탄했다. 퇴사한 후배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무엇보다 입시 학격으로 얻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2019년보다 훨씬 안정적인 정서에서 일할 수 있었다. 사람을 대하는 게 60%인 일이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고 없고는 업무 피로도에 큰 영향을 줬다.

 

초년생 땐 모르는 게 있어서 거래처에 전화를 할 때면 "이것도 모른다고 속으로 업신여기지 않을까" 걱정 했었는데, 이젠 "내가 모르면 아무도 모르는거야"라는 뻔뻔함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 2016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사한지 만 4년. 항상 나보다 최소 5년은 더 사회 경험이 많은 사람들을 거래처로 만나기 때문에 20대 중반이라는 내 나이가 날 위축되게 만들었던 시간도 있었다. 작년에 30대로 진입하면서부터는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더 편해지고, 처음 보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편하게 대할 수 있어서 스스로 "좀 노련해졌나?"라고 느끼는 한 해가 되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대학원을 걸어놓고 1년을 더 직장을 다닐 기회는 오지 않았겠지. 그건 마치 취뽀 통보를 받아놓고 입사 전까지 백수로 지내는 느낌과 비슷했다. 이 회사 이후의 단계를 고민하지 않고,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회사를 다닐 수 있었던 1년 남짓의 시간. 

 

그리고 다시 1월이 되어, 나는 C대학에 넣을 원서를 또 쓰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입학을 취소한 학생들은 작년 서류를 그대로 재활용해도 된다는 지침을 받았지만, 나는 지원서류를 다시 쓰겠다고 자원했다. 작년의 나와 올해의 나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사실 후회하고 있다. 이번에 또 붙을지 안 붙을지 확신 못하지만, 한 번 붙여준 걸 또 안 붙여줄까 싶다. 장학금 더 많이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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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극세사 스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