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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5. 27. 18:38 from 흘러가는대로 /.

강남 CGV 뒤 코코이찌방야로 시작하는 작은 골목 카페에 앉아있다. 이 골목에서 2013년을 통째로 보냈다. 대학교 3학년을 앞둔 겨울방학부터 골목 초입 건물 2층이었던 학원에 주5일 나가면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이문동에서 역삼동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갈아타는 1시간의 강행군을 감행하면서 아무도 시키지 않는 공부를 했다. 지금 생각해도 뭐에 홀려 그렇게 불어를 사랑했는지 모르겠다. 이듬해 8개월 간의 어학연수 끝에 애정은 시들해졌지만 아직도 이곳에 오면 그렇게 2013년이 애틋하다.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다. 프랑스어보다 학원을 간다는 그 행위 자체에 집착했던 거 같다. 생애 첫 남자친구와의 이별, 강렬했던 짝사랑, 자기혐오와 사투를 벌이면서도 빼먹지 않고 학원을 다녔다. 최후의 보루. 이것마저 포기하면 내 것이라고 부를 만한 게 아무것도 안 남을터였다. 매일 보는 선생님, 3명의 친구들 모두 사랑했다. 무언가에 몰두할 동안에만 심장박동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계속된 다이어트 때문에 몸이 망가져도 사투를 벌이듯이 학원을 갔다. 중간에 입원했던 8월의 딱 일주일 빼고 그 다음해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 3월까지. 그 시간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지금 봐도 애틋하다.

 

벌써 8년이 넘게 흘렀다. 이 골목에만 들어서면 그때로 돌아갈 수 없어서 아쉽다. 학원은 없어진지 오래지만 아직도 1층엔 코코이찌방야가 있다. 아직도 그 계단을 올라가면 선생님이 검지를 들어 불어 테이프를 켜실 거 같다. 그건 젊음이 부러운 것과는 확실히 다른 감정이다. 그리움.

 

그 이후로 20대를 통째로 보낸 남자친구를 만나기 전, 온전히 혼자 20대를 보낸 짧은 8개월.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고 나를 온전히 사랑하려고 애썼던 시간이라 더 길게 보내지 못해서 아쉽다. 외로웠던 감정만큼 책, 음악, 영화 모든 종류의 컨텐츠를 스펀지마냥 흡수하고 빠져들었었다. 그 나락에서 겨우 혼자 힘으로 설 수 있게 됐을 때 남자친구를 만났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됐을까. 

 

궁금하지만 가정일 뿐이니까 답은 평생 알 수 없겠지. 2014년엔 되돌릴 수 있는 가정이었겠지만 8년이 지난 지금은 아니다. 그때 했던 결정으로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학원을 다니다 자연스럽게 떠나게 된 프랑스 어학연수 중 이 업에 종사할 꿈을 처음 품었고 그 해 만난 남자친구와는 너무 오래 만나 나는 이제 그에 대한 설명없이 묘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2013년은 전반적으로 그런 해였다. 충동적으로 했던 결정들이 지금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정해버린. 나는 그 이후로 인생을 계획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어떤 우연이 미래를 만들지 알 수 없으니까. 인생은 그때그때 한 선택들의 결과를 책임지고 수습하는 일의 연속이 아닐까. 

 

이 골목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늙지 않는거 같다. 나의 2013년과 현재가 항상 뒤섞여 있는 공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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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극세사 스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