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 - 한강

2016. 4. 25. 22:02 from 읽고

* 추천해준 친구도 한 장 한 장 넘기는 게 너무 힘들어서 내게 추천해주기까지 많이 망설였다고 했다.

첫번째 장을 끝마치기도 전에 친구를 원망했다. 초반부터 먹먹하게 만드는 이런 책을 읽어서 남는 게 슬픔 밖에 더 있나. 픽션은 해피엔딩을 기대라도 할 수 있지. 이미 누구나 끝이 절망임을 알고 있는 사건을 다루는 책에 어떻게 위로가 있고 어떻게 감동이 있을 수 있냐고. 하지만 한 번 읽기 시작한 이상 끝까지 읽어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끝까지 읽어야 조금의 위로라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가에게 기대를 걸어보고 싶었다. 괴롭다고 중간에 그만두면 수치심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이런 일이 벌어진 나라의 국민이 나라는 게 부끄럽고, 국민에게 총을 겨누라 지시했던 추악한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자기 통장에 2십만원 밖에 없다고 호소하는 꼴을 봐야하는 게 너무 부끄러워서라도 작가가 끝에 무슨 말을 할 지 읽어봐야했다. 후반부에선 너무 울어서 마스카라가 번졌는데 그것마저도 부끄러웠다.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었다. 마음이 아프다고 근현대사 배우기를 피해온 나에게 더더욱 부끄러운 책이었다. 책의 마지막까지 읽어도 크게 위로가 되진 않는다. 작가 에필로그를 읽으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게 한결 수월해지긴 하더라. 읽는 게 힘겨운 이 책을 작가는 단어 하나하나 선택해가며 마주했을 것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더 잔인하게 기록과 기억들을 파헤쳐야 했을까. 이 책이 엑기스라면, 책에 담기지 못한 진실들, 그리고 진실로 증명되지 못하고 잊혀졌을 수많은 개개인의 이야기가 얼마나 두껍게 5.18 라는 역사를 에워싸고 있을까. 36년이 지났다. 하나의 사건이 역사로 자리잡을 수 있을만한 시간은 못 된다. 그래서일까 20세기에 태어난 내 의식 속에서 광주민주화운동는 내게 역사보다 정치성향과 더 긴밀하게 연결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한 나라의 군대가 국민에게 총을 겨눈 일을 두고 어떻게 좌파와 우파를 나눌 수 있는가. 잊지 말아야 한다 계속 얘기해야 한다. 50년이 흐르고 100년이 흐르고 광주가 역사가 되는 순간까지. 


* 집단적인 광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인간은 어디까지 포악해질 수 있는가. 어느 정도까지 폭력에 무뎌질 수 있는가. 맹목적인 복종과 그에 따른 처벌 혹은 보상만이 존재하는 집단에서 개인의 이성은 얼마나 마비될 수 있는가. 전쟁으로 폭력을 내면화한 군대가 총을 자국민에게 겨눴다. 그렇다면 죄는 군대에게 있는가 전쟁에게 있는가. 전쟁은 누가 시작한건가. 전쟁을 결정하고 군대를 파견한 국가의 수뇌부에게 원망을 돌려야 하는 것일까. 갈등의 당사자도 아니었던 국가가 자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몬 것은 나라가 약해서였을까. 만약 그렇다면 나라가 약한 것은 누굴 원망해야 하는가. 


*여러모로 삼키기 힘든 소설이었다. 다시 읽을 순 없을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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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2015. 4. 29. 23:16 from 읽고




"술맛이 참 부드럽네요, 미스 어밀리어. 역시 이 집 술은 뭔가 달라도 달라."(중략) 직조기와 저녁 도시락, 잠자리, 그리고 다시 직조기, 이런 것들만 생각하던 방적공이 어느 일요일에 그 술을 조금 마시고는 늪에 핀 백합 한 송이를 우연히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손바닥에 그 꽃을 올려놓고 황금빛의 정교한 꽃받침을 살펴볼 때 갑자기 그의 마음속에 고통처럼 날카로운 향수가 일게 될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눈을 들어 1월 한밤중에 하늘에서 차갑고도 신비로운 광휘를 보고는 문득 자신의 왜소함에 대한 지독한 공포로 심장이 멈추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미스 어밀리어의 술을 마시면 이런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

그러나 카페란 것은 전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부자이고 탐욕스러운 늙은 악한도 카페에서는 행동을 조심하고 누구를 모욕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가난한 사람들도 새삼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돌아보고 소금병 하나라도 우아하고 겸손하게 집는다. 제대로 된 카페라면 우정과 복부의 포만감, 그리고 흥겨움과 우아한 분위기, 이런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물론 그날 밤에 미스 어밀리어의 가게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런 규칙들을 미리 말한 적은 없었다. 그때까지 이 마을에 카페라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러한 규칙과 문화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이 카페가 마을의 중심이 된 것은 이런 따뜻함이나 실내 장식들, 그리고 밝은 불빛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카페를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데는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직까지 언급하지 않았던 모종의 자부심과 관계가 있다. 이 새로운 자부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삶이란 결국 값어치가 없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공장 주위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가족에게 필요한 음식이나 옷, 그리고 어느 정도의 고깃기름을 넉넉히 갖다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인생은 단지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한 하나의 길고 어두운 싸움일 뿐이었다.(중략) 마을 사람들은 이 카페의 테이블에 앉아있을 때 그런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그들은 미스 어밀리어의 카페에 오기 전에 세수를 했고 카페에 들어올 때는 정중하게 문지방에 신발을 문질러 흙을 털었다. 카페에 앉아있는 단 몇 시간이라도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 세상에 자신이 가치 없는 존재라는 쓰라린 생각을 조금은 떨쳐버릴 수 있었다. 


*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는 마빈 메이시를 쫓아내지 못했는데, 이는 혼자 남겨진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과 한 번이라도 같이 살아보고 난 후에 다시 혼자가 된다는 것은 지독한 고문이다. 난롯불만 타고 있는 방에서 갑자기 시계의 똑딱거린느 소리가 멈출 때 느껴지는 정적과 텅 빈 집안에 너울거리는 그림자 - 이런 혼자라는 공포와 마주하기보단 차라리 철천지 원수를 들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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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akfast at Tiffany's

2014. 10. 19. 20:31 from 읽고


"Never love a wild thing, Mr Bell," Holly advised him. "That was Doc's mistake. He was always lugging home wild things. A Hawk with a hurt wing. One time it was a full-grown bobcat with a broken leg. But you can't give your heart to a wild thing : the more you do, the stronger they get. Until they're strong enough to run into the woods. Or fly into a tree. Then a taller tree. Then the sky. That's how you'll end up. Mr. Bell. If you let yourself love a wild thing, You'll end up looking at the sky."




Those final weeks, spanning end of summer and the beginning of another autumn, are blurred in memory, perhaps because our understanding of each other had reached that sweet depth where two people communicate more often in silence than in words :  an affectionate quietness replaces the tensions, the unrelaxed chatter and chasing about that produce a friendships's more showy, more, in the surface sense, dramatic moments. Frequently, when he was out of town (I'd developed hostile attitudes toward him, and seldom used his name) we spent entire evening together during while we exchanged less than a hundred words ; once, we walked all the way to Chinatown, ate a chow-mein supper, bought some paper lanterns and stole a box of joss sticks then moseyed across the Brooklyn Bridge, and on the bridge, as we watched seaward-moving ships pass between the cliffs or burning skyline, she said : "Years from now, years and years one of those ships will bring me back, me and my nine Brazilian brats. Because yes, the must see this, these lights, the river -- I love New York, even though it isn't mine, the way something has to be, a tree or a street or a house, something, anyway, that belongs to me because I belong to it." And I said : "Do shut up," for I felt infuriantingly left out (...) 

So the days, the last days, blow about in memory, hazy, automnal, all alike as leaves : until a day unlike I ever li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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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끈따끈하게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시험은 현대미국소설로 Toni Morrison의 1970년작 The Bluest Eye가 범위였죠.

 

교수님 너-무 이쁘시고 너-무 착하시고 과목도 재미있지만 시험 볼 때 손을 johnna 혹사시켜야 된다는거ㅎㅋ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저는 literature 과목 시험을 볼 때 오히려 너무 이해하는게 많아서 그걸 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 못하는거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생각의 branch들이 뻗어나가다보니 핳핳^^;;;;;; 학교 특성상 영어언어학을 전공하지만, 영어권 문학을 전공하는게 오히려 더 적성에 맞았을 거란 생각도 종종 합니다...는 내 착각일수도 ㅋ?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는 뛰어난 학생이고 The Bluest Eye라는 작품을 뼛속..까진 아니고 한 근육까진 이해했는데 이 굼뜬 손이 제한 시간 90분이라는 벽을 만나서 작품에 대한 저의 심도 깊은 이해가  날개를 펼치치 못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아쉬운대로 아직 공부한 내용이 머리에 남아있을때 시험지에 풀지 못한 저의 심도깊은 이해를 블로그에 싸보고자 합니다.

혹시 혹시 혹시 혹시 혹시 교수님이 우연히 이 글을 보신다면, 그래서 시험지에 닿지 못한 저의 심도 깊은 이해를 알아보신다면 저의 점수에 조금은 은혜를 베풀어주시겠죠.

 

 

The Bluest Eye는 자신을 ugly하다고 생각하는 한 흑인 소녀 Pecola Breedlove가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고 철저히 망가져 버리는 이야기입니다. 자극적이죠. 하지만 이 소설이 의미하는 바는 그저 한 소녀가 끔찍한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백인 사회 내에 구조적으로 자리잡은 백인들의 흑인 비하, 흑인 자신들의 자기 부정과 자기 비하가 어떻게 희생자들을 재생산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축적된 아픔들이 최종적으로 한 명의 연약한 개인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이 쓰였던 1970년대 당시에는 BLACK IS BEAUTIFUL 운동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죠.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흑인들이 자신들의 신체적 특징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편견을 전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작가 Morrison의 소설은 오히려 이 운동에 대한 반문으로 시작됩니다. "왜 우리는 굳이 스스로 아름답다고 열창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본래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서양 세계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후 이분법적 사고 방식(Binary Thinking)에 의거해 세상을 규정해나가기 시작해요. 데카르트의 가르침으로 인해 몸(mind)과 정신(body)은 철저히 분리되고,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몸과 정신의 대립관계에 대입시켜 생각합니다. 

정신은 이성-냉철함-유럽-백인-백(white)-깨끗함 <우등> 

☞  "아름다움 = 백인성 = 미국적인 것(Beauty=Whiteness=Americanness)"

몸은 감성-열정-뜨거움-아프리카-흑인-흑(black)-더러움 <열등>

"추함 = 흑인성(Ugliness=Blackness)"

이런 공식으로 구체화되죠. 이 공식들을 이해하셨다면 The Bluest Eye의 60%는 파악하신 겁니다. 위의 논리가 무서운 것은 그것들이 그저 이론적인 논리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구조적으로 내재화되어 있었단 거에요.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조적 산물은 바로 대중문화. 흑인 여자아이들은 파란 눈과 금발의 곱슬머리를 가진 백인 아기 인형들을 들고 다니고, 어른들은 극장에 가서 아름다운 백인 배우들이 나누는 아름다운 사랑을 동경하죠. 백인들의 세상은 아름답고 깨끗하고 풍요롭습니다. 당시 흑인들의 힘든 일상과는 정반대의 삶이죠. 미국 문화 안에 자연스럽게 내재된 백인성에 대한 긍정은 흑인들로 하여금 "추함=흑인성"이라는 공식을 내재화하도록 합니다. 백인들이 설정한 미의 기준에 저항하기는 커녕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거죠. 그 결과, 흑인들은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망각하게 되고, 동시에 백인들의 관점으로 자신들을 조명하면서 흑인 사회 내에는 고질적인 자기 부정과 자기 혐오가 뿌리 내리게 됩니다. 


주인공 Pecola는 유달리 자신들의 추함에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흑인 집안에서 성장합니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Breedlove 집안 사람들은 '못생겼다'라고 묘사해요. 그러나 그들의 추함은 사실 얼굴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못생겼다'라고 믿음과 그러한 믿음에 대응하는 행동으로부터 나오죠. 후에 작가의 말에도 이런 구절이 나와요: "Beauty was not something to behold; it was something one could do."

아버지 Cholly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장성하고 찾아간 아버지에게도 버림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청소년기에 첫 성관계를 하던 중 백인 남성들에게 발각되어 그들 앞에서 강제적으로 성행위를 하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고 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Cholly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고, 의무감과 책임감이 결여된 채 "위험하도록 자유로운" 어른으로 성장해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마지노선이 Cholly에겐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하죠. Cholly를 움직이는 건 증오와 본능 뿐입니다. 

어머니 Pauline 역시 대가족의 절름발이 딸로 가족들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하며 자랍니다. 우연히 Cholly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후 새 지역으로 이사오지만, 그곳에서 역시 그녀는 백인들과 같은 흑인 이웃들의 텃새에 심하게 외로워해요. 신혼 초만 해도 아직은 정상인이었던 남편 Cholly는 공장에 나가 일을 했기 때문에 Pauline의 외로움에 공감하지 못하고 점점 더 자신에게 칭얼거리기만 하는 Pauline에게 지치기 시작하죠. 그 와중에 Pauline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영화관에 들락날락거리게 돼요. 화면 안의 세상에는 자신의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이 존재하고,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넘치는 세상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름다운 백인 여배우들의 몫이죠. Pauline의 백인성에 대한 갈망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이후로 두 명의 아이를 낳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이들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고 영화 속의 white한 세상과 현실의 black한 세상의 괴리 사이에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다 한 부유한 백인가정에서 일하면서 능력있는 가정부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인정을 받게 되면서 그녀는 비로소 자신을 긍정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집, 곧고 빛나는 금색의 머리칼을 가진 여자아이, 풍부한 식량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소관 하에 있죠. 백인 가정에 충실할수록 그녀는 자신의 가정에는 소홀해집니다. 동시에 Pauline은 두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흑인성에 대한 자기 경멸과 컴플렉스를 물려줍니다. 

이런 가정에서 Pecola은 모든 분노와 슬픔을 속으로 삭히는 아이가 돼요. 실제로 소설 안에서 Pecola는 그다지 말이 없죠. 부모님이 수시로 싸우고 오빠가 툭하면 가출하는 환경에서 Pecola는, 자신이 아름다운 파란 눈을 가졌다면 자신이 이렇게 불행하지 않았을거란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해요 파란 눈을 갖게 해달라고. Pecola는 또래에게도 '못생겼다'라며 손가락질을 받아요. 하지만 Pecola는 객관적으로 못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위축되어 있을 뿐이죠. 그리고 그러한 빈틈이 또래 아이들로 하여금 그녀의 흑인성을 손가락질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Pecola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비난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또 철저하게 믿었던거죠. 자신의 흑인성과 못생김을. 아이들은 자신의 흑인성을 모두 몰아 Pecola에게 덫씌웁니다. 그리곤 자신들은 마치 흑인성을 지니지 않은 마냥 Pecola를 비난해요. 흑인들조차 흑인성은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정체성이었습니다. 

어느날 Pecola를 보며 감정적인 애정에서 시작해 본능적인 애정에 지배당한 Cholly는 Pecola를 겁탈합니다. 결국 Pecola는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하고 학교에서 쫓겨난 후 파란 눈을 달라고 지역의 사기꾼 종교인에게 부탁을 하는데, 그의 거짓말을 믿어버린 피콜라는 이후에 자신이 파란 눈을 가졌다고 믿으며 정신 분열증을 일으키며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 Pecola vs. Claudia


소설은 Claudia라는 소녀와 전지적 화자의 시점을 통해 그려집니다. Claudia는 9살의 흑인 소녀로, 엄하지만 사랑으로 딸들을 보살피는 전형적인 흑인 가정의 둘째 딸입니다. Claudia와 그녀의 10살짜리 언니 Frieda는 우연한 기회로 Pecola가 그들의 집에 잠시 위탁되며 만나게 됩니다. Claudia는 소설의 화자이기도 하지만, 소설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흑인성 = 추함, Blackness = Ugliness"을 받아들인 흑인 사회 안에 팽배한 공식에 저항하는 유일한 흑인이죠. 모든 흑인 여아들이 갈망하는 백인 아기 인형을 예뻐하는 대신에 분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강하게 느끼고, 어린 백인 아기들을 괴롭히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 휩싸이기도 하는 그녀의 분노는 백인성을 지닌 특정한 대상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백인성을 추앙하고 흑인성을 격하시키는 구조적 편견을 향한 것입니다. 사회 안에 지능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흑백의 위계질서에 대해 Pecola가 수치스러움과 침묵을 동반한 내재화로 대응하는 반면, Claudia는 이에 반발하며 분노로 표출하는 것이죠. Pecola가 철저히 혼자 인종주의적 비난을 감수했다면 Claudia는 이를 외부와의 소통으로 해소합니다. 그리고 Claudia를 통해 작가는 미국 사회 내의 구조적인 흑인성의 자기 비하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옳지 않은 비난을 외부로 돌릴 수 있을만큼 강한 내면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의 문화를 기억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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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밤 - 나희덕

2013. 12. 16. 21:12 from 읽고




푸른 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올린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애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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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잠. - 숑아

2013. 7. 17. 22:15 from 읽고

여전히 시는 어렵다

그래도 내 친구 죠미헿이 블로그에 싸지르는 똥들을 보면 이 정도 시라면 나도 소화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놀랍게도 글빨의 원천은 추리소설, 판타지소설 그리고 동방팬픽ㅋ

 

내가 제일 좋아하는 4번과 12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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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저자
홍세화 지음
출판사
창비(창작과비평사) 펴냄 | 1995-03-0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
가격비교

 

내가 프랑스를 그토록 동경하는 이유를 두 가지 꼽으라고 하면 사회에 만연하게 퍼진 '애매함'과 끊임없는 언쟁을 꼽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애매함'돈처럼 계산할 수 없고 자처럼 딱딱 잴 수 없는, 가시적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들의 가치를 사람들이 알고 있으며 이것이 개인들의 행동에서 사회 전반에서 드러난다는 것. 돈, 명예와 같이 가시적이고 현실적인 가치들은 사회적 영향력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돈이 사회를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더더욱 눈에 보이는 것들을 쫓아가게 되었고 그러면서 동시에 전통, 예술, 예의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홀대하였다. 이것은 전세계가 자본주의의 영향 하에 있는 지금 범세계적인 추세일테지만, 왠지 프랑스만은 그 지적이고 고고한 콧대를 여전히 치켜들고 있는 느낌이 든다. 중고등학생들은 모든 과목에서 논술과 작문이 주를 이루는 시험을 치고 대학생들은 철저히 자신의 주장을 쓴 레포트를 요구받는다. 기계가 채점하는 오지선다형의 시험지를 치루고 교수가 강의한 내용과 책에 있는 자료들을 짜집기한 레포트를 제출하는 한국의 교육 실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애매함'이란 '정답이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답을 구하기보다 생각하기를 훈련받는 다는 것은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발견하게 하게 하고, 사람마다 더 좋게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 연장선으로, 언제나 서로의 의견을 물고 늘어지며 끊임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 또한 프랑스인의 특징이다(친구이자 나의 프랑스어 선생님인 Nicolas는 이러한 프랑스인들의 기질에 지쳐서 조국을 떠났다고 내게 고백한 바 있다.) 사회의 전체 분위기상 언쟁이 많다는 건 그 사회에 속한 개인을 피곤하게 만들 뿐이지 않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언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해당 사안에 대해 뚜렷한 주장이 있고 그걸 앞세워서 남들과 공유할 수 있을만큼의 근거와 지식이 뒷받침되었다는 뜻이다. 그러한 배경 위에서 건강한 논쟁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근거가 없는, 허물뿐인 주장으로 난무한 언쟁은 개인적인 감정 싸움으로 번지게 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쟁이 의견과 의견의 충돌이 아닌 개인과 개인과의 싸움으로 변질될 때 더더욱 '공존'의 자리는 좁아진다. 싸움의 끝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의 문제로밖에 귀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논쟁의 진정한 가치는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두 의견의 충돌을 통해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상대방을 설득하는 게 아니라 굴복시키는 데 목적을 둔 언쟁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상대방 모두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야할 때에만 한 단계 성숙한 결론을 맞이할 수 있다.  

 

위 두 가지 특징이 내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똘레랑스'의 큰 줄기들이다. 똘레랑스에 대한 부연 설명이 첨부된 맨 마지막 장을 읽어보면, 똘레랑스 정신이 프랑스의 역사적 토대 위에 성립했음을 알 수 있다. 서양 역사에서 다름을 배척하기 위해 피가 동원되었던 사건들은 크고 작었던 종교 분쟁들과 나치의 인종주의였다. 전자는 16세기 신교-구교 간의 종교 분쟁으로 프랑스에서도 발생하였고 '성찰적 이성에 눈뜨지 못한 인간이 '다름'을 빌미로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고 집단적 광기로 나아갈 수 있는지(p373)'를 되돌아보게 했을 것이다. 그 결과 하나의 신념과 행동 방식만이 옳다는 아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똘레랑스 개념이 형성되었고 더 나아가 17세기 인문학자들과 18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회의론과 이성주의가 발달하였다. 그런 면에서 똘레랑스는 단순히 '관용'만을 의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 사회에 여러가지 이념이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다름'을 인정하도록 함으로써 소수에 대한 다수의, 그리고 약자에 대한 강자의 횡포를 막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부끄러운 과거는 프랑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똘레랑스 개념이 프랑스에서만 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잊지 않았고 선대의 실수를 후대가 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되새김질했기 때문이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만든 일종의 제어장치. 그것이 바로 프랑스의 똘레랑스이다. 그래서일까. 프랑스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에만 열광하지 않는다.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지만 단단한 뿌리를 지닌, 그래서 쉽게 흔들리지 않는. 그것이 이 책을 읽고 내가 느꼈던 프랑스의 인상이다.

 

 

*오늘부터 진지하게 역사 공부를 해봐야겠단 생각을 했다. 프랑스의 역사에 대한 얘기보다도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작가의 회고록이 더 생소하게 느껴졌다는 건 정말이지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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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극세사 스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