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선희 (2013)

2014. 9. 26. 08:33 from 보고



"우리 왜 헤어졌던거야?"


"형, 나 오늘 선희 만났어. 걔 하나도 안 변했어. 여전히 너어무 예뻐."


"니가 좋으니까, 니 옆에 있고 싶으니까. 나 니 옆에 있어도 되겠니?"


"누군지 밝히긴 싫고. 많이 어려. 근데 걔도 여자라고 오늘 아침 걜 생각하는데 막 여기가 뛰더라니까?"


"선배 제가 만수 만나서 화났어요? 안 났어요? 제가 만수 만나도 아무렇지 않아요?"

"...아니 안 괜찮아. 근데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잖아"


"넌 여기 웬일이냐?"

"저 선희 만나러 왔어요."


"선희 걔가 착하지. 조금 소심하지만 안목도 있고. 용감하기도 하고."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나봐."

"그나저나 걔 잠수타면 안될텐데. 걔 잠수타면 이년이고 삼년이고 해요."


* 개인적으로 나는 히어로물이나 환타지물보다도 평범한 사람들이 만나 만들어 내는, "관계"의 특별함를에 대한 영화를 더 좋아한다. 행복에 섞인 슬픔, 사랑에 섞인 증오, 우정에 섞인 질투. 모든 관계는 여러가지의 감정적 요소로 이루어지고 있고, 이 요소들은 두 사람 사이에 생겨난 모든 사건들로부터 그 비율이 결정되기 때문에 어느 관계도 똑같이 생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흔히 우정, 사랑, 동료 등으로 관계를 규정하지만, 관계란 애초에 각 영역 안에서 생겨나는게 아니라, 이미 형성된 관계에 이름표를 거치는 과정을 거친다. 한국말을 못하는데 이런 얘기하려니 말이 잘 안 나온다. 쉽게 얘기하자면, 내가 어떤 남자를 만났을 때 처음부터 "저 사람과 나의 관계는 사랑이다/우정이다"라고 규정해서 그 사람과 연인 혹은 친구가 되는게 아니라, 그 사람과 겪은 일련의 사건들로 우리 사이엔 어떤 관계가 생기고, 그 특징들을 통해 그것이 사랑인지 우정인지 분류하는 것이다. 하지만 똑같이 사랑이라는 분류 안에 있다고 해서 나와 그 사람의 관계가 다른 커플의 '사랑'과 같은 형태인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다르게 생겼고, 우리는 그나마 겹치는 속성들로 그것들을 같은 카테고리 안에 넣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끔 사랑이나 우정이란 단어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너무 단순화해서 규정짓게 한다고 생각한다. 언어에 생각이 갇히는 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은 이만큼이나 복잡해서, 나는 주인공들간에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인물들간에 형성된 그 특수한 '관계'를 관객들이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영화가 진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홍상수 감독 영화는 처음 본다. 나는 배우 따라 영화 보는 스타일도 아니지만, 영화에 대해 아는게 없으므로 감독 찾아서 보는 스타일도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해선 문외한인 나도 홍상수는 들어봤다. 지루할 정도로 일상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말에 굉장히 궁금했었다. '지루할 정도의 일상'이야말로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겐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까.



* 2년의 잠수 끝에 돌아온 불안정한 선희가 있고, 선희를 좋아하는 동기 만수가 있고, 선희에게 여자로 흔들리는 선생님이 있고, 선희를 귀여운 후배로 생각하지만 역시나 선희에게 이성적으로 흔들리는 재혁이 있다. 선희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분야는 영화인게 확실하지만, 판에 뛰어들 자신은 없는지 유학을 가고자 한다. 이에 그녀는 추천서를 받으러 학교에 가는 것으로 2년 간의 원인 모를 잠수에 종지부를 찍는데, 다시 나타난 선희는 세 남자의 마음을 흔들어 버리고, 만족스러운 추천서를 손에 넣자마자 다시 제 갈 길 가버린다.


여자 입장에서 선희는 그냥 완전 짜증나는 캐릭터ㅇㅇ 딱 여자들이 '성격은 개떡 같은게 반반한 얼굴 믿고 남자 꼬시고 다닌다' 라는 말 들을만한 스타일. 근데 더 열받는 건 이런 애들은 자기 욕먹는거 신경도 안 쓴다. 여자애들이 놀아주지 않아도 남자애들이 알아서 멍석 깔아주거든. 인터뷰 찾아보니 선희를 연기한 정유미 역시 '캐릭터를 이해하냐'라는 인터뷰 기자의 질문에 '아뇨.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처음 대본 받았을 때 "얘 왜 이래;; 나쁜년"이라고 생각했어요'라고 답변했다본인에 대한 확신은 없는데 남들이 자신을 낮게 보는건 못 참는. 자존감이 좀 없다 해야되나. 그와중에 그걸 들키긴 싫어서 조금만 손해 받는 듯한 느낌을 받으면 금방 날카롭게 행동하는. 지 할말은 다 해야되는데 남 지적 듣는건 싫어하는. 그 와중에 얼굴은 뽀얗고 눈이 새까만게 약간 뾰루퉁한 표정이 새침하게 어울리는 앙칼진 여자다. 


선희가 자신을 아낀 세 남자들을 만나러 갔던 이유는 자신을 긍정해줄 누군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서 얻지 못하는 애정은 남에게서라도 받아 채워야 한다. 특히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나의 어떤 점을 내가 사랑할지 알 턱이 있나. 그러나 선희는 남이 주는 애정에 보답할 마음도 없다. 그래서 술 취한 만수의 '보고 싶었어' '많이 좋아했어' '나 태어나서 너만큼 예뻐한 여자 없어' 따위의 주정은 실컷 들어주다가 '우리 왜 헤어졌어?'라는 질문에 황급히 자리를 떠나버린다. 선생님과 재혁과 술을 마시고 스킨쉽까지 하지만, 애초에 돌아온 목표였던 추천서가 손에 들어오자 황급히 세 남자를 떠나 버린다.

 

나는 이 영화의 남자들이 왜 자꾸 선희를 착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자기들이 호구가 되고 있는 줄은 모르고. 남자들 말론 착한 여자 좋다고 하지만, 대체로 남자는 이런 '성난 다람쥐' 스타일의 여자들에겐 사족을 못 쓰는거 같다. 물론 얼굴이 졸라 예뻐야햠. 나 역시 속으론 욕하지만, 솔직히 이런 성격의 여자애들이 부럽다. 주변 사람들 피 말리지만 본인은 너무 속편하게 잘 사니까. 그래서 선희는 맘에 안 든다. 얼굴 이뻐서 더 싫어. 선희같은 고민을 하는 여자들은 많다. 그 나이때 그런 고민 안 하는 사람 있나. 근데 예쁘니까 남자들이 발 벗고 도와주려고 하는 거 봐. 이상 열폭은 여기까지. 


* 홍상수 감독의 바로 전작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이란 영화와 비교하면서 기표 어쩌구 저쩌구 하는 리뷰들을 봤는데, 나는 그런 거 모르므로 자존감 낮은 재수 없는 기집애가 나와서 세 남자 홀려놓고 목표를 이루고 나선 셋 다 낙동강 오리알 신세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영화라 요약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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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극세사 스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