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끈따끈하게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시험은 현대미국소설로 Toni Morrison의 1970년작 The Bluest Eye가 범위였죠.

 

교수님 너-무 이쁘시고 너-무 착하시고 과목도 재미있지만 시험 볼 때 손을 johnna 혹사시켜야 된다는거ㅎㅋ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저는 literature 과목 시험을 볼 때 오히려 너무 이해하는게 많아서 그걸 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 못하는거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생각의 branch들이 뻗어나가다보니 핳핳^^;;;;;; 학교 특성상 영어언어학을 전공하지만, 영어권 문학을 전공하는게 오히려 더 적성에 맞았을 거란 생각도 종종 합니다...는 내 착각일수도 ㅋ?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는 뛰어난 학생이고 The Bluest Eye라는 작품을 뼛속..까진 아니고 한 근육까진 이해했는데 이 굼뜬 손이 제한 시간 90분이라는 벽을 만나서 작품에 대한 저의 심도 깊은 이해가  날개를 펼치치 못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아쉬운대로 아직 공부한 내용이 머리에 남아있을때 시험지에 풀지 못한 저의 심도깊은 이해를 블로그에 싸보고자 합니다.

혹시 혹시 혹시 혹시 혹시 교수님이 우연히 이 글을 보신다면, 그래서 시험지에 닿지 못한 저의 심도 깊은 이해를 알아보신다면 저의 점수에 조금은 은혜를 베풀어주시겠죠.

 

 

The Bluest Eye는 자신을 ugly하다고 생각하는 한 흑인 소녀 Pecola Breedlove가 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하고 철저히 망가져 버리는 이야기입니다. 자극적이죠. 하지만 이 소설이 의미하는 바는 그저 한 소녀가 끔찍한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과정이 아니라, 백인 사회 내에 구조적으로 자리잡은 백인들의 흑인 비하, 흑인 자신들의 자기 부정과 자기 비하가 어떻게 희생자들을 재생산하는지 그리고 그렇게 축적된 아픔들이 최종적으로 한 명의 연약한 개인을 얼마나 파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이 쓰였던 1970년대 당시에는 BLACK IS BEAUTIFUL 운동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죠. 196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흑인들이 자신들의 신체적 특징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편견을 전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작가 Morrison의 소설은 오히려 이 운동에 대한 반문으로 시작됩니다. "왜 우리는 굳이 스스로 아름답다고 열창해야만 하는가? 우리는 본래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서양 세계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후 이분법적 사고 방식(Binary Thinking)에 의거해 세상을 규정해나가기 시작해요. 데카르트의 가르침으로 인해 몸(mind)과 정신(body)은 철저히 분리되고,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몸과 정신의 대립관계에 대입시켜 생각합니다. 

정신은 이성-냉철함-유럽-백인-백(white)-깨끗함 <우등> 

☞  "아름다움 = 백인성 = 미국적인 것(Beauty=Whiteness=Americanness)"

몸은 감성-열정-뜨거움-아프리카-흑인-흑(black)-더러움 <열등>

"추함 = 흑인성(Ugliness=Blackness)"

이런 공식으로 구체화되죠. 이 공식들을 이해하셨다면 The Bluest Eye의 60%는 파악하신 겁니다. 위의 논리가 무서운 것은 그것들이 그저 이론적인 논리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구조적으로 내재화되어 있었단 거에요.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조적 산물은 바로 대중문화. 흑인 여자아이들은 파란 눈과 금발의 곱슬머리를 가진 백인 아기 인형들을 들고 다니고, 어른들은 극장에 가서 아름다운 백인 배우들이 나누는 아름다운 사랑을 동경하죠. 백인들의 세상은 아름답고 깨끗하고 풍요롭습니다. 당시 흑인들의 힘든 일상과는 정반대의 삶이죠. 미국 문화 안에 자연스럽게 내재된 백인성에 대한 긍정은 흑인들로 하여금 "추함=흑인성"이라는 공식을 내재화하도록 합니다. 백인들이 설정한 미의 기준에 저항하기는 커녕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거죠. 그 결과, 흑인들은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망각하게 되고, 동시에 백인들의 관점으로 자신들을 조명하면서 흑인 사회 내에는 고질적인 자기 부정과 자기 혐오가 뿌리 내리게 됩니다. 


주인공 Pecola는 유달리 자신들의 추함에 강한 믿음을 갖고 있는 흑인 집안에서 성장합니다. 이웃 사람들은 모두 Breedlove 집안 사람들은 '못생겼다'라고 묘사해요. 그러나 그들의 추함은 사실 얼굴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못생겼다'라고 믿음과 그러한 믿음에 대응하는 행동으로부터 나오죠. 후에 작가의 말에도 이런 구절이 나와요: "Beauty was not something to behold; it was something one could do."

아버지 Cholly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장성하고 찾아간 아버지에게도 버림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청소년기에 첫 성관계를 하던 중 백인 남성들에게 발각되어 그들 앞에서 강제적으로 성행위를 하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안고 살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Cholly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고, 의무감과 책임감이 결여된 채 "위험하도록 자유로운" 어른으로 성장해요.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마지노선이 Cholly에겐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하죠. Cholly를 움직이는 건 증오와 본능 뿐입니다. 

어머니 Pauline 역시 대가족의 절름발이 딸로 가족들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하며 자랍니다. 우연히 Cholly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후 새 지역으로 이사오지만, 그곳에서 역시 그녀는 백인들과 같은 흑인 이웃들의 텃새에 심하게 외로워해요. 신혼 초만 해도 아직은 정상인이었던 남편 Cholly는 공장에 나가 일을 했기 때문에 Pauline의 외로움에 공감하지 못하고 점점 더 자신에게 칭얼거리기만 하는 Pauline에게 지치기 시작하죠. 그 와중에 Pauline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영화관에 들락날락거리게 돼요. 화면 안의 세상에는 자신의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이 존재하고, 화려함과 아름다움이 넘치는 세상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아름다운 백인 여배우들의 몫이죠. Pauline의 백인성에 대한 갈망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 이후로 두 명의 아이를 낳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이들에게서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고 영화 속의 white한 세상과 현실의 black한 세상의 괴리 사이에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다 한 부유한 백인가정에서 일하면서 능력있는 가정부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인정을 받게 되면서 그녀는 비로소 자신을 긍정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집, 곧고 빛나는 금색의 머리칼을 가진 여자아이, 풍부한 식량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소관 하에 있죠. 백인 가정에 충실할수록 그녀는 자신의 가정에는 소홀해집니다. 동시에 Pauline은 두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흑인성에 대한 자기 경멸과 컴플렉스를 물려줍니다. 

이런 가정에서 Pecola은 모든 분노와 슬픔을 속으로 삭히는 아이가 돼요. 실제로 소설 안에서 Pecola는 그다지 말이 없죠. 부모님이 수시로 싸우고 오빠가 툭하면 가출하는 환경에서 Pecola는, 자신이 아름다운 파란 눈을 가졌다면 자신이 이렇게 불행하지 않았을거란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해요 파란 눈을 갖게 해달라고. Pecola는 또래에게도 '못생겼다'라며 손가락질을 받아요. 하지만 Pecola는 객관적으로 못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저 위축되어 있을 뿐이죠. 그리고 그러한 빈틈이 또래 아이들로 하여금 그녀의 흑인성을 손가락질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Pecola는 자신에게 돌아오는 비난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또 철저하게 믿었던거죠. 자신의 흑인성과 못생김을. 아이들은 자신의 흑인성을 모두 몰아 Pecola에게 덫씌웁니다. 그리곤 자신들은 마치 흑인성을 지니지 않은 마냥 Pecola를 비난해요. 흑인들조차 흑인성은 수치스러워해야 하는 정체성이었습니다. 

어느날 Pecola를 보며 감정적인 애정에서 시작해 본능적인 애정에 지배당한 Cholly는 Pecola를 겁탈합니다. 결국 Pecola는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하고 학교에서 쫓겨난 후 파란 눈을 달라고 지역의 사기꾼 종교인에게 부탁을 하는데, 그의 거짓말을 믿어버린 피콜라는 이후에 자신이 파란 눈을 가졌다고 믿으며 정신 분열증을 일으키며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 Pecola vs. Claudia


소설은 Claudia라는 소녀와 전지적 화자의 시점을 통해 그려집니다. Claudia는 9살의 흑인 소녀로, 엄하지만 사랑으로 딸들을 보살피는 전형적인 흑인 가정의 둘째 딸입니다. Claudia와 그녀의 10살짜리 언니 Frieda는 우연한 기회로 Pecola가 그들의 집에 잠시 위탁되며 만나게 됩니다. Claudia는 소설의 화자이기도 하지만, 소설 안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흑인성 = 추함, Blackness = Ugliness"을 받아들인 흑인 사회 안에 팽배한 공식에 저항하는 유일한 흑인이죠. 모든 흑인 여아들이 갈망하는 백인 아기 인형을 예뻐하는 대신에 분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강하게 느끼고, 어린 백인 아기들을 괴롭히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 휩싸이기도 하는 그녀의 분노는 백인성을 지닌 특정한 대상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백인성을 추앙하고 흑인성을 격하시키는 구조적 편견을 향한 것입니다. 사회 안에 지능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흑백의 위계질서에 대해 Pecola가 수치스러움과 침묵을 동반한 내재화로 대응하는 반면, Claudia는 이에 반발하며 분노로 표출하는 것이죠. Pecola가 철저히 혼자 인종주의적 비난을 감수했다면 Claudia는 이를 외부와의 소통으로 해소합니다. 그리고 Claudia를 통해 작가는 미국 사회 내의 구조적인 흑인성의 자기 비하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옳지 않은 비난을 외부로 돌릴 수 있을만큼 강한 내면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들의 문화를 기억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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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극세사 스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