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1

2013. 11. 30. 04:04 from 흘러가는대로

 
외할머니는 방이 그 사람의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고 하시며 내 방이 더러움을 걱정하시곤 하셨었다. 내 방은 23년 동안 더러웠다. 


어렸을땐 "더러운 방이 뭐 어때서. 쓰는 나만 편하면 되는거지"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깔끔한 엄마의 딸로 귀에 못 박히게 들은 이십여년어치의 잔소리들 덕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지저분한 방이 조금씩 신경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뿐. 여전히, 내 방은 더러웠다. 

오늘 아침, 세탁기에 넣지 못한 수건, 바닥에 반으로만 접힌채 널부러진 청바지들, 부엌에 반환하지 못한 물컵들을 보면서 내 방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침마다 눈에 띠는 물건은 바지런히 제자리에 갖다 놓으려고 하는데 어째서 그렇게 더러운걸까. 

방이 정말 사람의 마음을 보여준다면, 날 그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 뭘까. 내 방은 흡사 아침부터 빚쟁이로부터 도망치느라 황급히 비운 집마냥 더럽다. 무엇에 쫓기고 있는걸까, 내가 진 빚은 무엇인가 

내가 돌보지 못한 모든 것들이 물건이 되어 내 방에 가라앉은것 같다. 
책상 위엔 반납하지 않은 도서관 책이, 
복습하지 못한 프린트들이, 
한동안 아무것도 쓰지 않은 일기장이, 
매일 마셔야하는 비타민 드링크가. 

바닥엔 어젯밤에도 하지 못한 마사지 기계가, 
세탁기에 넣지 않은 신었던 양말들과 개지 않은 청바지들, 
이리저리 얽힌 콘센트줄이.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더러운 방을 보고 있노라면 가끔씩
이 방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버리고 싶단 생각을 한다. 
버릴 것들을 고를 바에야, 차라리 모두 버리고 가는 것이 낫다.
사방이 흰 벽으로 둘러싸인, 아무것도 없는 방으로.

그 방엔 버릴 것은 없고 채워야할 것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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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극세사 스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