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2015. 12. 9. 21:49 from 흘러가는대로

저녁 8시경 집에 먼저 들어와 가족들에게 어디야?’라고 단톡방에 올리니 아빠가 들어가는 중. 너무 힘들어라고 적어냈다. 가슴이 철렁했다. ‘힘들다. 아빠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현관에 구두를 벗는 순간 딸바보 모드로 자동전환 되는 아빠를 보며 어떻게 직장 다니는 사람이 저렇게 스트레스 분출을 안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사랑미라면 누구나 집에서는 풀어지기 마련인데다가 기분이 안 좋은 날도 분명 있었을 텐데, 내가 기억하는 한 아빠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무드 스윙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집에서는 절대 회사얘기를 하지 않았고 아빠 힘들다, 뽀뽀 한 번 해달라는 식의 징징거림조차 없었다. 분명 압박이 심한 직장에서 줄곧 중책을 맡아 왔으면서도 체력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흐트러지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작은 결정 하나도 시원하게 내리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기가 빨릴 때까지 두고두고 고민하는 나는 아빠가 부러웠다. 아빠는 해야 하면 고민 없이 돌진하고 임무를 완수하는 사람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빠가 이런 생활을 30년이나 버텨왔구나 라고 생각하니 가족들 배려한답시고 속으로 삭힌 게 많았을 거 같아서 안타까웠다. 어렸을 때 아빠를 한번이라도 영웅으로 생각한 적이 없는 아이가 과연 있을까.


마침 오늘 점심 시간에 차장님과 수다를 떨다가 가족 얘기가 나왔다. 아버지가 작아지기 시작하는 날이 온다고. 그게 그렇게 안쓰러워 보일 수가 없다고 하더라.


나는 이제 성인이고 키로는 아빠를 조금 웃돌지만, 역시 아빠는 아직도 내겐 영웅이다. 어떻게 그렇게 스트레스 없이 일하냐 는 내 질문에 아빠는 어떻게 스트레스가 아예 없겠냐 고 하면서도 해야 하니까 하고, 이왕 하는 거 열심히 하고, 그래서 잘 되면 다행이고 못 돼도 그만이니 너무 분해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소신 있게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 그러면서도 좋은 아빠, 좋은 아들, 좋은 형으로서의 역할도 불평 없이 안고 가는, 그런 아빠도 어깨가 작아 보이는 날이 올까.


이십 분 뒤에 아빠가 들어왔다. 일이 많아서 힘든 건 줄 알았는데, 술을 마셔서 힘든 거였다. 몇 잔 마셨냐고 물어봤는데 세 잔이란다.


우리 아빠지만 너무 귀여운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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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극세사 스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