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8

2021. 2. 19. 00:08 from 흘러가는대로 /.

스스로 글 쓰는 걸 즐긴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빈 종이는 항상 바다 같았다. 너무 광활해서 막막한. 초등학생 땐 백일장 원고지, 고등학생 땐 논술답안지, 대학생 땐 한글 프로그램을 띄운 컴퓨터 화면, 내겐 다 똑같았다. 텅 빈 종이라는 건 너무 힘들어서 한 자도 안 쓰고 멍 때리는 시간으로 시작했다. 글 쓰는 게 직업이 된 지금도 이 고사 지내는 시간은 변함없다. 김작가가 머리 속에서 단어와 문장이 마구 떠오르는데 그걸 타이핑하는 손가락이 못 따라간다고 했을 땐 충격적이었다. 쟤는 종이가 넓다고 느낄 새도 없겠구나. 

 

그래도 기억 나는 순간들은 있다. 초등학교 4학년에 탔던 백일장 최우수상. 내 초중고 통틀어 가장 큰 상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내내 숙제로 쓴 일기장. 줄 간격이 1센치 남짓한 공책을 처음 쓰는거였는데 주제 하나 잡아 한두줄 쓰다보면 한 페이지 꽉꽉 채워지는 게 신기해서 열심히 써 냈었다. 대학교 1학년 땐 서양 문화와 영화란 교양을 수강했었다. 수업 시간엔 영화만 보여주는 꿀 교양이었는데, 출석과 수업 당일날 내는 반페이지짜리 영화 감상문에 학점이 달려있었다. 꼭 당일날 제출하는 과제에 반항심을 느끼면서도 쥐어짜다보면 매번 스스로 그럴듯하다 싶은 글을 제출했었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밖에 나갈 수 없게 되자 퇴근 후 침대에서 멍하니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음악도 듣고 유튜브도 보고. 말라버린 해초같이 저녁 시간들을 흘러보내길 몇 달, 요즘 들어서야 내 글을 쓰고 싶단 생각이 들더라. 누가 주제만 잡아주면 신나게 써내려 갈 수 있을 거 같은데. 근데 돌이켜보니 써야겠단 의무감으로 종이를 폈어도, 몇 줄 써내려가다보면 공간이 채워져있고 그랬더라. 그래서 오늘은 글쓰기에 대한 글을 썼다. 대학교 졸업할 무렵엔 글빨이랄 게 좀 있었던 거 같은데 역시 많이 무뎌졌다. 잘 하기보다 몸을 움직였단 것 자체에 스스로를 칭찬해주는 날도 있어야 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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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극세사 스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