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이주 간의 체류를 마치고 지난 월요일 한국으로 돌아갔다. 원래 비행기는 그 전 금요일 오후에 뜰 예정이었으나, 에어프랑스의 파업 덕에 월요일에 대한항공 껄로 표를 교환했다.(엄마는 파업의천국이라 불리는 나라의 진면모를 느끼고 돌아갔다) 금요일전까지는 사실 조금 부담이 됐었다. 엄마는 자기 신경 쓰지 말고 너 할 일 하라 했지만, 나는 엄마가 온 이상 혼자 내버려두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자주자주 보러 갔었고 그 와중에 새로 시작한 반의 레벨이 맘에 들지 않아 이걸 사무실에 말해 말아 고민하며 엄청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엄마는 내심 미안해했던거 같다. 나는 휴가 3 주동안 한국어만 해서 불어가 엄청 퇴화한 것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그 와중에 공부는 못하고 엄마와 더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엄마한테 괜히 불안감을 내비추기도 했다. 엄마는 나한테 혼자 있는 것도 좋으니 걱정말라고 했지만 나는 장녀병이 있는지라 엄마를 혼자 두는 것도 맘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금요일이 다가오자 나는 아쉬웠다. 갑자기 아쉬웠다. 비행기가 미뤄졌다는 소식을 목요일에 듣고 속으로 많이 기뻐했다. 그리고 금 토 일 더 주어진 시간이 선물이라도 된 마냥 엄마와 나는 10일 간 했던 대화보다 더 많은 얘기를 했다. 첫 며칠과 달리 엄마와 손을 잡고 걷는게 익숙해졌고 나는 학교가 끝나고 엄마를 보러 가는 일이 설레기 시작했다. 엄마네 숙소에서 자고 난 아침엔 숙소 앞 예쁜 카페에서 나는 생크림 올라간 카푸치노를, 엄만 더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가을이 되자 손이 건조해져서 손을 더 많이 뜯었다. 엄마는 내가 식탁 밑으로 손을 뜯을 때마다 기껏 손까지 예쁘게 낳아줬거만 아직도 그걸 괴롭힌다며 타박을 주기도 하고, 제발 그만 뜯으라고 애원하기도 하고, 가끔은 자기 손에다 핸드크림을 잔뜩 묻혀 내 손에 발라주기도 했다. 엄마 손은 내 손보다 살짝 더 차갑고 더 부드럽다. 부드러운 엄마 손이 까칠해진 내 손 끝에 닿을 때마다 내 손이 얼마나 거친지 느껴지는게 싫어서, 엄마가 핸드크림 발라주겠다고 할 때 마다 나는 매번 핑계를 대며 도망치려 했다. 엄마가 떠난 날, 나는 수업이 있어서 엄마가 기차역에서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대신 길거리에서 포옹을 했는데, 그게 더 잘된 걸 수도 있다. 기차역에서 혹은 공항에서 하는 이별은 너무 슬프다. 그 사람이 멀리 떠나는게 너무 명백한 장소가 아닌가. 그 날은 공허했지만 버틸만 했다. 새삼스러웠다. 평생을 같이 산 엄마에게도 며칠 새에 '정'이 들 수 있구나. 다음날은 오전 수업을 하는데 엄마 생각이 너무 많이 났다. 그래서 공강 시간 동안 숙소 앞 카페로 가보기로 했다. 첫 날 다소 쌀쌀 맞으셨던 아저씨는 이제 날 반갑게 맞아주셨다. 내가 주문을 하기도 전에 더블 에스프레소와 카푸치노 하나씩 달라고 직원에게 말했는데, 내가 엄마는 어제 떠나서 없다고, 카푸치노만 달라고 했다. 엄마와 항상 앉던 그 자리에 앉았다. 이틀 전 그 자리에서 엄마가 내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줬었다. 진짜 찌질한데 조금 눈물 났다. 카페 사진을 찍어서 한국에 도착한 엄마에게 보내주었다. 그르노블에 엄마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생겼다.
일을 하던 엄마. 다른 아줌마들과 달리 결혼 후에도 자기 이름을 걸고 일을 하는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엄마가 딸 둘을 키우면서 커리어가 늦어진만큼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마자 '독립'에 대한 강박증을 빠르게 키워나갔다. 엄마가 맘 편하게 일하려면 내가 엄마 없이도 잘 해야 해. 누구의 도움 없이도 잘 해야 해. 순전히 내 능력으로 얻지 않은 것은 언젠가는 빼앗기게 돼있어. 라며 자신을 강하게 채찍질했다. 자매 아니랄까봐, 나와 내 동생은 그런 면에선 똑 닮았다. 남자한테 얹혀가려는 여자를 한심하게 보고, 여자로서 자신의 일은 자기만 지킬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된다면 남자도 장애물이라고 망설임 없이 규정해버린다. 그래서 나는 내가 꽤나 독립적인 여성으로 자라는데 성공했다고 은근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면에서 엄마의 부재가 크게 느껴진단 거 자체가 나에겐 작지 않은 사건이었다. 겉으론 강하고 아무도 날 건들이지 말라고 내 인생의 결정은 내가 한다고 고집 부리지만, 사실 나는 아직 엄마품을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부끄럽거나 하진 않다. 이게 나인걸 어떡해. 몸만 컸지 아직도 출근하는 엄마를 보내면서 현관 앞에서 목청 떨어져라 울던 4살 여자아이다. 혼란스럽기도 하다. 엄마는 나에게 '엄마'라기보다 '친구'이길 바란다. 모든 엄마는 딸의 친구이기를 바랄테지만, 나도 정말로 엄마와 '친구'같은 사이가 되기 전까진 이런 관계의 의미를 잘 알지 못 했다. 엄마와 친구가 된다는 건, 더 이상 엄마가 '엄마'라는 신성한 위치에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엄마'는 희생적이고 사랑이 넘치고, 나를 위해 존재하며 모든 걸 포용한다. 그녀는 완벽한 어머니이자 완벽한 아내. 악이 내재해선 안 되는 사람. 내가 맞게 설명하는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어머니'란 말엔 무언가 신성한, 불가침영역적인 무언가가 있다. 한편, 엄마와 친구가 된다는 건 엄마를 한 명의 사람으로 보는거다. 엄마도 실수를 하고, 욕망을 가지고, 원인 모를 우울이나 분노에 휩싸이는 평범한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엄마의 체류 동안, 나는 엄마와 '사람 대 사람다운' 대화를 많이 했다. 인간으로서의 엄마를 알아가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특히나 엄마를 신성화하고 이상향으로 삼아온 사람에겐 더더욱. 가장 무서운 것은 엄마가 저지른 실수들을 내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될 까봐 하는 우려이다. 어떤 사람의 의견이나 삶에 대한 가치들에 대한 비판적 수용, 즉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견해의 차이로 남길 것인가의 문제는 상대방을 객관화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반면 나는 엄마를 한 명의 사람으로 보는 과정을 거치고 있긴 하지만 나에게 여전히 엄마는 엄마다. 내가 사랑을 받았으면 하는 존재이고 여전히 그녀는 나의 롤모델이다. 이런 내가 엄마를 친구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엄마의 가치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성숙한 어른이라고 하기엔 너무 이른 거 아닐까?
이십대 중반의 여성이 블로그에 엄마 글을 쓰는건 유치하거나 상투적일 것이다. 나는 24살의 허세녀라 유치한 것도 싫고 상투적인 것도 싫지만 나의 팔할은 엄마를 따라하면서 만들어낸 자아이기 때문에 내 생각을 적는 블로그에서 엄마 얘기가 빠진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 같았다(쓰길 잘 한 거 같다. 이렇게 긴, 글다운 글이 나올 줄은 예상 못 했다). 엄마에 대한 보고싶음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 지 모르겠다. 남자친구가 보고 싶을 때 그 감정은 확실하다. 속상한 걸 얘기하고 싶다거나, 손을 잡고 싶다던가. 키스를 하고 싶다거나, 아님 그보다 더 한 걸 하고 싶다거나. 하지만 스킨쉽도 서툴고 사랑한다는 말도 서툴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 고주알 떠들지 못했던 애교 없는 딸은 손에 핸드크림을 발라주던 그 부드러운 손이 그립다고 밖엔 할 수가 없다. 그것 마저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해서 오늘도 아마 '엄마 뭐해?' 정도의 메시지로 말을 걸고, '한국 돌아가니까 좋아?'라는 쪼잔한 질문으로 섭섭함을 내비치겠지. 난 분명 엄마 배에서 나왔을텐데, 알고 지낸지(?) 만으로 23년. 그녀는 여전히 나에겐 어려운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