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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26. 21:40 from 흘러가는대로

1. 개강한지 한 달이 되어간다. 계획만큼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읽어갈 것들을 충분히 따라가지 못 하고 있고 과제도 제출 전날 허겁지겁 처리하고 있다. 신문도 일주일에 잘 하면 한 개 읽고 있고 인문학 스터디를 위해 일주일에 책 한 권씩 읽어가는 것도 완벽하게 해내고 있지 못하다. 그 와중에 벌려놓고 싶은 건 많아서 몸이 근질근질하다. 몇 달 째 운동을 쉰 탓에 죽어가는 엉덩이를 보고 있자니 내일이라도 헬스에 등록하고 싶어지고 얼마전엔 백예린 노래를 듣다가 나도 다시 보컬이나 배워볼까 싶은 생각도 했다. 참고로 후자는 집에 아무도 없을때 해봤는데 다시 한 번 나는 몸으로 할 수 있는 활동 중에서 노래를 제일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포시 접었다. 학교, 보컬, 운동에다 피아노와 과외, 주4일 불어학원까지 다닌 시절이 있었다니 그때의 내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그땐 왜 이 간단한 것도 못할까 자책했지만 이제보니 그건 누구도 소화할 수 없는 스케쥴이었다.


2. 저번주부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있다. 근거없는 추측이었지만, 제목이 말도 안 되게 좋아서 책까지 좋을리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 근.거.없.었.다.ㅋ 소설책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가 내 독서 철칙임에도 불구하고 인상깊은 구절이 나올때마다 책 모서리를 접다가 1부를 다 읽었어갈때 쯤 이 기세로 가다간 책 전체를 접어버리겠다 싶어서 포기했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이름을 많이 들었었고 마침 엄마 서재에 꽂혀 있어서 언젠가 한 번 읽어야겠다 싶으면서도, 오히려 너무 찬양 받아서 혼자 저항하고픈 그런 책이었다. 왜 진작에 안 읽었지 하는 생각보다 지금 이 나이에 이 시점에 이 책을 읽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2년 전에 읽었더라면 이해를 못하고 '왠지 좋은거 같지만 왜 좋은진 모르겠고 그냥 남들에게 책 좀 읽었다고 자랑하기 위해 제목을 외워둘' 책이 됐을거다. 엄마는 이 책이 너무 좋아서, 사촌동생이 빌려가서 돌려주지 않자 그저 소장용으로 한 권을 더 샀다.


3. 어제 정치경제번역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 은밀한 칭찬을 받았다. 나는 과제 제출이 의무는 아니었지만 이번 학기에는 학문에 열을 올려보기로 했으므로 그냥 내버렸다. 교수님은 과제를 제출하지 않은 학생들을 타박하진 않으시지만 막상 과제의 결과물이 맘에 들지 않으시면 공개적으로 지적을 하시는, 대쪽 같은 면이 있으신 분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과제 제출 직전에 마지막까지 손을봤고 혹여나 지적 당할까 맘을 졸이며 제출했었다. 어제 출석을 부르시면서 내 이름을 부른 직후에, 머리는 여전히 출석부를 향한 채로 안경은 콧등까지 내려 눈동자만으로 날 응시하시며(교수님의 시그니처 표정이다) 고개를 여러번, 진중하게 끄덕이셨다. 어리둥절했지만 그 의미를 깨달은 후엔 수업 시간 2시간 내내 싱글벙글했다. 별 거 아닐 수 있고 어려운 과제도 아니었지만, 작은 과제를 해도 너무 많은 성의를 붓는 바람에 무슨 일이든 완성하기까지 남들보다 두세배 걸리는 나는 이런 칭찬이 너무 고맙다.


4. 어제 친부에게 몇 년 동안 성적 학대를 받아온 자매의 기사를 읽었다. 14년을 성폭행과 성추행에 시달린 언니는 결국 작년에 자살했고 3년 동안 성추행을 당한 동생은 일을 하며 홀어머니와 사는 중이다. 자매는 아주 어린 나이에서부터 '병원 놀이'라며 학대를 받았고 부모가 이혼하고 나서도 친부는 자매를 찾아와 괴롭혔다고 한다. 자살한 언니는 4살 때 친할머니에게 이 얘기를 했으나 할머니는 오히려 이 얘기를 밖에서 하면 고아원으로 보내버린다고 했기 때문에 할머니가 타계한 2010년에서야 친부의 성학대를 어머니에게 공개, 이후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으나 작년 25살의 나이로 자살했다. 동생은 올해 24살로 한남대교에서 자살을 시도하다 경찰에 구조되면서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다. 친부는 혐의를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동생이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구속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놀랐다는 대목을 읽는데 너무 마음이 아팠다. 모녀는 시간이 많이 지났고 직접적 피해자인 언니가 자살해서 법적으로 처벌한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단다. 


또 어제 다른 사이트에서는 성폭행 피해자들이 강간범들에게 들었던 말을 써놓은 포스팅을 봤는데, 그 중에 "This is what all fathers do to their little girls... You know I love you"를 보고 너무 화가 났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이미 저버린 25살의 청춘은 누가 보상해줄 수 있나. 지금까진 산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은 24살은 앞으로 몇 년 동안 이 악몽 속에서 살아야 하는걸까.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남자가 여자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치사한 폭력. 


우리 사회는 갖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계층 간 '갑질'에 민감하면서, 너무 일상적으로 보도가 된 탓인지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갑질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진듯하다. 원체 인터넷 기사에 댓글을 달지 않는 내가 작년에 처음으로 누군가와 댓글로 논쟁을 했다. 기사는 여고생이 문신을 하러 갔다가 시술자한테 성폭행을 당한 사건을 다뤘는데, 거기 댓글이 '그러게 왜 여고생이 문신을 하러 가냐'가 지배적인걸 보고 나는 경악했다. 그래서 나도 흥분한 나머지 '여기서 여고생이 문신을 왜 했냐는 얘기가 도대체 왜 나오냐. 그래봤자 머리에 허세 찬 고딩일텐데 문신을 하러 갔으니 성폭행 당해도 싸다는거냐'라고 써놨더니 누군가 나더러 너나 댓글들 제대로 읽으라고 누가 성폭행 당해도 싸댔냐 그냥 문신을 하러 간 여고생도 잘 한 게 없단거지 라고 반박하는 댓글을 보고 할 말이 없어졌다. '진짜 이 사람 답이 없다'는 생각 밖에 안 났지만 그렇게 얘기했다간 비웃음을 살 것이 분명했다. 나는 지금도 저런 사람을 현실에서 만나면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득해야할지 모르겠다. 논리학을 배우지 않은게 천추의 한이 된 순간이었다. 


5. 문제의 게시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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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극세사 스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