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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 19. 00:52 from 흘러가는대로

다음주 월요일에 내 후임이 들어온다. 근무는 엄연히 다음주 금요일까지지만 이 회사에서의 나의 '일상'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은 내일이 마지막이다. 월요일이 되면 내 책상을 나눠써야 할테고, 뇌를 굴리지 않고 처리할 수 있었던 일상 업무를 할 때마다 하나하나 설명해야 할테고, 하루하루 지날수록 "오늘이 여기서의 마지막 월요일, 화요일 ... "임을 마음속으로 세게 될테니까. 


그제 면접자들의 필기 시험지를 채점했다. 나만큼 잘 쓰는 애가 있어서 괜히 심술이 났다. 오후에 게스트 리포트를 번역하면서 얼굴도 모르는 내 후임자에게 뒤지고 싶지 않아 괜히 문장에 멋을 부렸다. 후임자를 뽑고, 나도 다음 직장이 정해지고 나니 정말 내가 떠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다. 2주 전까지만 해도 드디어 이번 달이 마지막이라며, 지나치게 오래 이 곳에서 시간을 쓴 것 같다고 말하고 다녔다. 근데 막상 떠나려니 정말 너무 아쉽다. 유난히 더러운 (내) 책상, 텁텁하지만 익숙한 사무실 공기,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텅 빈 사무실에서 신문을 정리하는 일. 가장 아쉬운 건 역시 사람들이다. 이제야 온전히 편해지고 손발이 맞기 시작한 팀원들, 지나갈 때마다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을만큼 익숙해진 옆팀과 옆옆팀 사람들, 떠나기 전에 밥이나 한 번 먹자고 해주는 다른 팀 팀장님들. 처음 들어왔을 땐 모두 어렵고 까마득했던 사람들이다. 입사하고 나서 첫 두세달은 사무실 공기가 차고 너무나 외롭다고 느꼈었다. '그들' 사이에 끼지 못하는 느낌. 내가 헤르미온느가 아닌 이상 이들이 함께 지내온 물리적 시간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론 알면서도 마음으론 그렇게 몇 달을 외로워했었다. 이제야 겨우 편해져서 "아 나도 이제 이 조직 사람이구나"라고 느끼기 시작한 지 두달이 안 됐는데 나는 이제 떠나야한다.


2월 초까지만 해도 이렇게 빨리 떠나게 될 줄은 몰랐다. 1월 말에 ㅇㅁ가 구정이 있으니 2월 금방 갈거라고 했을 때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구정 뒤에도 2주나 있는데 왜? 하며 태연히 넘겨버렸었다. 1월 말부터는 허리가 아팠다. 나는 업무 시간 중에 한의원을 다니고 또 일찍 퇴근했다. 이제 이 곳에서의 '일상'을 떠나 보내려니 한의원을 가는 것으로 훼손되었던 지난 3주가 괜히 아쉬워진다.  


나는 내 전임자만큼 ㅇㄱ, ㅈㄱ언니와 죽이 잘 맞지 않았다. 그게 오랫동안 괴로웠다.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었을 뿐더러 하나의 적응 과정이었고 받아들이면 편한 일이었지만, 나는 당시 칼같은 일처리와 원만한 성격으로 모두의 갈채를 받고 떠난 전임자에게 컴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다. 내가 언니들 사이에서 적응을 못 하고 있는 사이에도 그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니들과 단톡방에서 나보다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바심이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모두 다르게 생겼고 전임자가 맺고 있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같이 있는 시간이 쌓이면 로 그 관계도 나름의 모습을 갖춰가는 법인데, 나는 "왜 전임자 같은 사람이 아닐까"라며 아주 오랫동안 언니들을 어색해했다. 나도 내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연기하려고 하니 어색할 수 밖에. 내 진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바람에 온전한 관계 쌓기도 지연되었다. 이제 겨우 언니들과 관계다운 관계를 쌓은지 한 달 반. 좀 더 빨리 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어제는 디자인팀 유 차장님이 점심을 사주셨다. 여름에 맨 처음 같이 점심을 먹었던 밀양돼지국밥집에서 먹었다.10월 달에 한 번 큰 고생을 함께했고 그 뒤론 뜸하게 일 한 두 번 해 본 게 다인데도 내가 떠나는 걸 아쉬워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같이 작업하면서 "그래 이렇게 손발이 맞아야지" "(내 번역물을 보시며)그래 이 정도는 해야지" "니 건이니까 이 기사는 크게 잡아줄게" 농담 같이 말씀하시지만 차장님은 이런 방식으로 아쉬워하는 분이다. 초기엔 너무 무뚝뚝하셔서 작은 부탁 하나도 드리는 게 너무 어려웠었다. 


내일은 인수인계 자료를 뽑아서 폴더에 끼워 넣어야겠다. 책상에 두었던 짐들도 조금씩 빼야한다. 컴퓨터 바탕화면에 어지럽게 깔린 파일들도 정리해야지. 이제부터라도 사무실 사진을 조금 찍어볼까. 요즘은 3년 전의 일도 희미해진다. 나는 카메라 렌즈보다 내 눈으로 순간을 기억하려고 하는 걸 선호하는 사람이지만, 기억도 매개체가 있어야 떠오르더라. 아, 떠나기 전에 팀원들이랑 십전대보탕도 마시고 싶다. 여전히 그걸 무슨 맛으로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 날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들 선물은 뭘로 하지. 한 명 한 명 짧게 메모라도 써주고 싶은데, 게으른 내가 과연 그게 가능할까.. 입사했을 때는 퇴사할 때 쯤 전설의 인턴으로 남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흠 잡을 데 없는 일처리로. 근데 지금은 그냥.. 약간 덜렁거리고 더러웠지만 애는 참 좋았어 라는 말로 남았으면 좋겠다. 


내일 마지막 '일상'을 가장 일상적으로 보내고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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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극세사 스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