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도착 3주, 학교 시작 -1주차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게으르기도 했고 쉬고 싶단 갖가지 핑계로 글쓰기를 두고두고 미루었다. 열심히 관광을 하거나 친구들을 만난 것도 아니다. 관광객으로 왔을 땐 뉴욕 같이 멋진 도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학생 신분으로 오니 설렘은 없다. 시작할 학기에 대한 두려움 뿐^^ 그래도 지금 느끼고 있는 소회들은 잊혀질테니, 역시 기록을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오랜만에 블로그에 들어왔다. 떠오르는 생각은 많지만, 정신 없으니 시간 순으로 써보자.
지금 철학대 옆의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맑은 날이다. 뉴욕 토박이친구 왈, 컬럼비아 철학대학원엔 또라이가 진짜 많다고 한다. 얼마나 재미있을까. 나도 철학대학원 다니고 싶다.
1. 8월 11일 비행기가 뉴욕 JFK에 착륙하자마자 허리를 다쳤다. 과장하는 게 아니고 진짜 비행기에서 내리기도 전에 다쳤다. 14시간 비행이 원래 안 좋은 허리에 부담을 주기도 했지만, 배낭에 온갖 전자기기를 다 넣어왔기 때문에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그걸 캐비넷에서 꺼내 둘러메고 좌석에 두고 가는 게 없나 확인하러 잠깐 허리를 숙인 찰나, 척추가 전류에 감전된 거 같은 익숙한 감각이 허리 쪽에 느껴졌다. 그 길로 장장 5일을 맨하탄에서 한시간 떨어진 삼촌네 집에서 요양만 했다. 이때 시차를 잡지 못해 2주 동안 해를 보고 나서 잠들고 오후 5시에 일어나 저녁 먹는 기이한 생활패턴을 유지했다.
2. 기숙사엔 8월 15일 일요일 밤에 들어갔다. 허리가 완치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삼촌이 주중엔 너무 바빠서 그날 안가면 다음 주말까지 삼촌네 집에서 지내야 할 상황이었다. 캐리어 두개 들고 맨하탄으로 들어가는 건 선택지에 없었다. 내 체력엔 멀쩡한 허리로도 힘든 도전이었다.
건물은 생각한 것보다 외관이 낡았고 내부는 룸메이트가 보내준 사진보다 훨씬 넓었다. 인테리어는 깔끔했는데, 다음날 청소해보니 청결상태는 엉망이었다. 청소서비스는 엉망이지만 교육 서비스는 이것보단 낫길 바란다 컬럼비아 내가 돈을 얼마나 내고 여기 왔는데. 두고 보자. 입주한 다음날은 가구도 이리저리 옮겨보고, 바닥청소도 다시 했다. 허리가 다시 망가졌다.
베개, 침구부터 시작해 노트북, 조명, 독서용 의자, 매트리스까지 기본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다 구비하기까지 2주가 걸렸다. 시간이 오래 걸린 가장 큰 이유는 매트리스였다. 학교에서 제공한 매트리스는 너무 푹신했다. 동기들에게 a massive dish washing sponge라고 농담했지만 여기서 9개월 살았다간 허리가 완전히 망가질거란 위기 의식만은 진짜였다.
또 다른 이유는 이케아의 말도 안되는 배송기간이었는데, 토요일에 주문을 넣으니 그 다음날 일요일에 왔다. 한국에선 아무리 이케아라도 이렇게 장사했다간 망하지 않을까. 나는 한국에서 쿠팡의 로켓배송이 낳은 부작용, 배달서비스의 속도경쟁, 배달원의 처우 등의 이슈에 더 크게 공감했던 사람이다. 어느 업체에서 시켜도 2, 3일 안에 오는데 굳이 총알 배송이란 게 필요할까 라는 의구심을 품었던 나조차 일주일 이상 배송이 걸리니까 얘네는 장사할 생각이 있긴하냐 는 불평이 육성으로 나오더라.
근데 배송만 오래 걸린 게 아니고, 매장에 물건이 없었다. 매트리스는 누워봐야 하니까 겸사겸사 한시간 반동안 대중교통을 타고 브루클린으로 내려갔었는데 물건이 진열만 되어 있고 재고가 거의 없었다. 이케아 뿐만 아니라 그 전 주에 방문했던 Target도 텅텅 빈 진열대가 즐비했다. 세탁 용품을 사러 갔었는데 에이 설마 아무것도 없겠어 하고 직원을 찾아 물어보니 wiped out이란 표현을 썼다. 슈퍼마켓 진열대가 비었다는 게, 소매업 특성상 용인될 수 있는 일인가? 하여간 미국애들 정말 속편하게 장사한다- 라며 성실함과 서비스정신이 종특인 한국인 스그스가 생각했다.
그나마 확실하게 빠른 게 아마존이다. 아마존 프라임 멤버가 되면 그 다음날 배달이 오는 물건도 꽤 많다. 예상배송일도 알려주는데, 지금까지 칼같이 지켜졌다. 미국에서 아마존은 소비자 편의로 주는 비교우위가 확실한 서비스다. 나는 여전히 신속배달업에 회의적이지만, 당장 마켓에 물건이 없다는 핑계로 자주 사용하고 있다. 불편 앞에 신념은 무너졌다.
생활 공간의 정비가 이렇게까지 올린 데엔 내 문제도 있었다. 5월 말에 무조건 방을 빼주기로 계약이 되어있기 때문에 큰 가구의 경우 1년 안에 처분할 각오를 하고있다. 그러다보니 물건 하나하나 사는데 지나치게 신중해졌고 한꺼번에 여러개를 사기보다 마음에 드는 게 나올때까지 검색하고 그때그때 주문하다보니 여러모로 귀찮아졌다.
집에 필요한 물건이 다 채워진 게 지난주 화요일이었다.
3. 지난주 주말에는 3박4일 보스턴에 다녀왔다. 초등학교 동창인 은이가 약사일을 하고 있고, 재수학원을 같이 다닌 현이가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외로움에 지쳐 충동적으로 예약한 여행이었다. 은이가 자기 집에 재워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시내에 호텔을 예약해줬다. 그 덕에 4일 동안 탄탄한 퀸사이즈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편하게 잘 수 있었다. 밖에서 관광하며 보낸 시간보다 그 호텔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지만 그렇게 편안하게 쉰 것도 오랜만이라 후회는 없다. 밤마다 은이가 찾아와 저녁 먹고 두세시간씩 보스턴을 걸어다니면서 수다 떨었다. 은이와는 다른 거 안해도 그게 가장 재미있다.
은이를 마지막으로 보스턴에서 본 게 2012년 여름이었다. 3주 동안 뉴욕에 홀로 여행온 동안 잠시 다녀갔는데 그때 약대생이었던 은이는 모종의 이유로 햇빛도 들지 않는 작은 아파트 방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서 잤지만 내 생애 가장 구린 숙소에서 지낸 그 며칠이 정말 행복했다. 은이는 고1 때 유학을 갔기 때문에 몇년만에 본 거였는데 마치 한번도 떨어지지 않은 것마냥 얘기가 잘 통했다. 불행했던 중학생 시절 몇 안되는 좋은 기억이 지은이와 영어학원을 다닌 일이었다. 한국에서 찾은, 드물게 나랑 잘 맞는 친구였다.
3-1. 은이가 휴가를 내서 유일하게 나와 숙소에서 같이 묵을 수 있던 날 밤, 내가 6살부터 8살까지 살았던 아파트까지 걸어 갔었다. MIT 대학원을 다니는 부부들이 입주할 수 있는 기숙사 단지. 놀이터 시설이 업그레이드 된 거 빼곤 똑같았다. 건물 외관, 그때나 지금이나 드넓은 주차장, 계단쪽 페인트 색깔, 놀이터 외곽을 따라 아무렇지 않게 널부러진 자전거와 킥보드 그리고 바닥에 흙 대신 깔린 나무 조각에서 나는 화학품 냄새까지. 내 어린시절이 그대로 박제되어었다. 학교 건물, 테니스장, 찰스강, 다리 등 기억의 파편 같이 남아있던 장소들이 머리 속에 지도로 재구성되는 거 같았다.
보스턴은 반가운만큼 혼란스러웠다. 행복했던 기억들만 떠오르니 더더욱 그랬다.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엔 한번도 삶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동네에서 나랑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놀았던 게 그때 뿐이다. 그 기간이 없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소심하고 사회성 없는 어른이 됐을거다.
한국에서 상담을 받은 첫 날, 이 나라에서 20년 넘게 살았지만 항상 이방인 같았고 이질감 없이 융화되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학교 첫날의 공포는 아직도 생생하다. 저는 고작 초등학교 3년을 외국에서 보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다르다고 느낄까요? 라고 하니 선생님은 그 시간이 결코 작지 않다고 하셨다. 단추가 다르게 끼워진걸까. 그래서 보스턴에 오니 심란했다. 여기였지 참. 내 첫 단추 끼워진데가.
이곳에서 2년이 그 이후 한국에서의 삶을 너무 외롭게 만들었는데도, 나는 그 2년의 시간보다 돌아오기까지 걸린 20년의 시간이 더 야속했다. 이렇게까지 오래 걸려야했을까? 하버드에서 MIT, Westgate 를 걷는 내내 그 생각만 들었다. 더 빨리 왔더라면. 여기서 학교를 다녔다면 나는 더 많은 것들을 성취하고 더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스무개에 가까운 과목들을 암기해서 시험 치는 교육과정에 번번히 패배했다. 단 한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학창시절 산산조각난 자존감은 평생의 숙제가 되었다. 대학에선 두꺼운 원서들을 읽어야 하는 수업들을 골라 들었고 피피티 외워서 시험 치는 수업들보다 항상 더 좋은 점수를 얻어냈다. 그때도 유학이 단순히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열망이 아니고 나랑 더 맞는 길이 아니었을까 수도 없이 생각했었다.
마침 나 갔을 때가 학부생들 입주하는 주말이라 학교 앞에 어린애들이 즐비했다. 하나같이 부러웠다. 너네는 여기서 앞으로 4년 동안 최고의 교육을 받겠구나. 전세계 대다수 사람들이 책으로만 이름을 접하는 석학들과 읽고 배우겠구나. 그렇게 해서 기를 수 있는 사고의 힘은 엄청나겠지? 다시 생각해도 부럽다. 방금 이 문단 쓰다가 눈물날뻔했다.
지금이라도 왔으니 다행이고 늦지 않았다! 라고 나도 생각하고 싶은데 내가 등록한 건 9개월짜리 professional school이라 좀 부족하다. 학문을 가르치거나 사고의 폭을 키워주는 게 아니고 기자라는 일종의 문과 기술직을 키워내는 기관에 가깝다. 심지어 다른 전공 애들은 저널리즘스쿨 밖 타대학에서 선택 과목 하나씩은 들을 수 있는데 경제산업분과 애들은 회계학으로 지정되어 있어서 선택권이 없다^^..
하지만 어디 가서 "어렸을 때 오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아서 너무 아쉽다 아빠는 날 왜 굳이 한국에서 교육시켜야 한다고 고집부렸나 완전 오판이다"라는 소리 해봤자 배부른 고민이기 때문에 친구들에겐 이런 얘기 안하고 침묵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 주어진 환경안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겠지. 자꾸 과거에 사로잡혀서 현재의 일에 소홀해지고 싶지 않다. 그건 지난 20년으로 충분했어.
4. 뉴욕에서의 모토를 정했다. Work hard, play hard. 지금껏 내 인생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궁극적인 이유는 둘 중 어느 것도 충분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애매하게 work해야할때 play하고 play할 때 work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하고. 멍때리고 누워서 스마트폰 하거나, 쓸데없이 낭비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to do 리스트와 루틴을 만들어 보려고 한다. 지금까지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 루틴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열쇠를 문 옆 고리에 걸어놓는 것. 중학교 때 여러번 열쇠 때문에 지각한 적 있는 나로선 큰 성과다.
어젯밤엔 오늘을 위한 투두리스트를 작성했고 지금 하나씩 해나가는 중이다. "블로그에 글쓰기"도 그 중 하나였다. 중요도 별 두개짜리. 이걸로 또 하나 지웠다.